어린 사람으로부터 배운 황 손승

조선 시대의 문신 황 손승은, 고집으로도 유명했지만, 효자로도 소문이 대단했다. 나중 그의 효성은 나라에까지 알려져, 1706년 숙종은 그의 효를 기리는 뜻에서 그에게 '직장'이란 벼슬을 내리기도 했다. 황 손승이 얼마나 까다롭게 예절을 따졌는지를 말해주는 일화가 있다. 평양에 사는 그가 어느 날 볼일이 있어 한양을 들르게 되었다. 분주히 길을 가다가 그는 우연하게 어릴 적 벗을 만났다.

"자네, 이거 몇 해 만인가?"

"평양 촌뜨기라고 한양에 올라오면 안 되는 법이라도 있나?"

"반가워서 하는 말일세.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가롭게 떠들고 있을 때가 아니네. 자네 남산골에 살던 강처지 기억나나?"

"기억하다마다. 글벗을 어찌 잊는단 말인가. 나랑은 자주 서신 교환을 하고 있다네. 그런데 그 친구가 어떻게 되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러기에 내가 서둘자는 거 아닌가. 그 친구 이제 이승 사람이 아닐세. 어제 눈을 감았다네. 나도 방금 그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문상을 가는 길이네. 잘 만났네, 함께 감세."

그러자 황 손승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아닐세, 나는 서둘러 평양으로 내려가야겠네."

"이 사람아, 어릴 적 벗이 죽었다는데 평양에 내려가겠다는 건 무슨 망령된 말인가? 한양에 왔으니 의당 친구 문상을 해야지."

황 손승은 여전히 고개를 내저으며 차분차분 말했다.

"여보게, 내가 이번에 한양에 올라온 것은 볼일이 있어서였네. 그런데 오랜 벗이 죽었다니, 이번에 찾아가면 영이별을 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렇다면 예의를 갖추어 정중하게 찾아가야지 딴 볼일보러 왔다가 겸사겸사 찾아갈 수는 없네."

"그럼, 자네 평양 집에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겠다는 건가?"

"암, 그렇고 말고."

"자네 고집은 내 이미 알고 있네만, 그건 지나친 처사일세."

"아닐세, 죽은 친구를 어찌 소홀히 대한단 말인가. 그럴수록 더욱 예의를 갖추어야지."

결국 황 손승은 서둘러 평양으로 내려간 다음 문상가는 차림을 하고는 다시 한양으로 올라와 남산골 강첨지의 초상에 참석했다. 한양에서 평양까지 5백 리, 그러니까 왕복 천 리를 오간 셈이다.

다음은 그의 고집을 말해주는 일화 한 토막이다. 황 손승이 사는 마을에 제법 폭이 넓은 개울이 있었는데, 평소에는 괜찮지만 장마철만 되면 따로 징검다리를 놓지 않고는 건너다닐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해 돌다리를 놓게 되었다.처음에는 하찮은 일이라고 생각하여 쉽게 시작을 했는데, 막상 해보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큰 돌을 구하기가 힘이 들었다. 그런데 마침 근처 주인 없는 무덤 가에 쓸만한 돌이 꽤 널려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잘 되었다는 듯, 그 무덤 가의 돌을 빼와 돌다리를 쌓는 데 썼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황 손승은 노발 대발을 했다.

"고얀 사람들 같으니라구. 아무리 주인 없는 무덤이라지만 그곳돌을 빼쓰다니.....나는 앞으로 절대로 그 돌다리를 밟지 않을 테다."

과연 그 뒤로 황 손승은 실제로 그 돌다리를 밟지 않았다. 어쩌다 그 개울을 꼭 건너야 할 일이 있으면 바짓가랑이를 벗어 올린 채 점범점벙 내를 건넜다. 그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그의 고집에 혀를 내둘렀다.

그런데 그 돌다리가 생기자 한 떼의 도둑들이 밤에 그 밑에 숨어 다리목을 지키다가, 혼자 지나가는 행인의 짐을 털기 시작했다.

"차림으로 보니 행세깨나 하는 선비인 모양일세. 값진 물건 잔뜩 지니고 있어야 할 텐데."

"쉿, 개울 가에 다왔네."

도둑들이 숨어 벼르고 있는지도 모르고 개울 가로 온 선비는 다리 건널 생각은 않고,버선을 벗더니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렸다. 그러고는 맨발로 점벙점벙 내를 건너는 게 아닌가. 도둑들은 대뜸에 그 선비가 누군지를 알 수 있었다.

"황고집, 그 양반이군."

"과연 소문대로야."

황고집, 그가 바로 황 손승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고집스럽고 까다롭게 예의를 따지는 황 손승이지만, 또 효성이 지극하여 나라에서 벼슬까지 내린 황 손승이지만, 그의예절 어긋남을 말없이 꾸짖은 사람이 있다. 다른 사람 아닌 그의 며느리가 그 주인공이다.

황 손승의 아들이 나이가 차 며느리를 맞게 되었다. 예의 범절 까다롭게 따지는 황 손승인만큼, 얼마나 며느릿감을 고르고 골라 맞아들였겠는가. 며느리를 얻은 다음 날, 황 손승은 일찍 일어나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며느리가 아침 문안 인사 오기를기다렸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아무리 기다려도 며느리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황 손승은 짜증을 내며 계집종을 불렀다.

"새아기가 아직 자리에 있는 건 아니렸다?"

"예, 벌써 일어나 세수하고 단장까지 마쳤습니다."

"그런데 왜 나에게 아침 문안 인사를 오지 않는 거지?"

"그렇지 않아도 제가 그 말씀을 드렸더니, 아직 더 기다려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기다려야 된다고? 무엇을 말이냐?"

"영감마님께서 먼저 사당 문안을 드린 다음에 문안 인사 드리는 법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뿔싸!"

사당이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다. 문안 인사란 웃사람부터 차례로 하는 것이 제대로 된 격식인만큼, 며느리는 시아버지가 먼저 사당에 다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옳은 순서였다. 황 손승은 그제야 깨닫고 사당을 다녀왔다. 아무리 예의 범절에 까다롭고 효성이 지극한 황 손승이라 하더라도, 나이 어린 사람으로부터 배우고 깨우칠 점이 있었던 것이다.

소년소녀 삼강오륜, 배영기 편저/김동리 추천, 민서출판사(1991) pp.129~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