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의 의미 효행이야기
 
효행이야기, 유언겸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07.12.20 조회: 3008

 

 

 

임금님과 호랑이까지도 감동시킨 효자(孝子) 유언겸(兪彦謙)

유언겸은 관향이 창원(昌原)으로 연산군 2년(1495)에 천안시 풍세면 공사동(貢士洞)에서 출생하여 명종 8년(1553)에 서거하신 분이다. 하늘이 낸 효자로 수령과 관찰사의 장계로 천지되며 용담(龍潭) 인제(麟蹄) 신계(新溪) 문화(文化)의 4개군을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청백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형조정랑(刑曹正郞)으로 재임하였으나 추관(秋官)보다는 목민관이 그의 자질에 맞았던 모양으로 정랑으로서는 특기할만한 기록을 남기지 못하였다.

유언겸의 자(字)는 겸지(謙之)요,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고단하게 자랐으나 어려서부터 예(禮)를 닦는데 노력하였다. 장성한 후 어려서 아버지 상을 당하여 초종 범절을 예대로 못 모신 것이 한이 되어 성인이 된 후 추상 3년을 입었다.

추상이지만 애통하는 정경이 초상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공이 추상을 입으매 초기에는 인근 선비들이 진실을 의심하였으나 3년의 세월동안 여일하게 예대로 준수하니 모두 진정에서 우러나온 효행이라고 인정하였다. 그리고 공은 가세가 몹시 빈곤하여 가옥이 황폐하여 지붕이 골이 나고 벽이 허물어져 풍우조차 가리기 어려웠으며 의복과 음식에 궁함을 감추지 못했었다.

그러나 모친을 모시는데는 온갖 노력을 다하여 따뜻한 옷과 구미에 맞는 음식으로 봉양하였다. 공의 아내는 절구질과 물 긷는 천역을 맡아 가계를 도왔으며 공은 농사일을 직접해서 생계를 도왔다. 이렇게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선비의 본심을 지켜 학문의 길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어진 소문이 인근에 자자하였다.

농사일을 몸소 하였으나 예대로 행실을 지켰으니 천품이 지극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지극한 효성도 그 모친의 생명을 영원하게 하지는 못하여 마침내 모친상을 당하였다. 모친상에 초종 범절을 한결같이 예문에 좇아 준행하였으며 3년 시묘를 살았다. 이 시묘살이 삼 년 동안 한번도 집에 들른 일이 없었다.

여막에서 샘이 멀어 물을 길어 오기에 매우 힘이 들었다. 그런데 하루는 여막 부엌에서 물이 용출하였는데 맑고 깨끗하여 식수와 용수에 넉넉하였다. 이 사실을 이웃 사람들은 모두 지극한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라 하여 공을 한층 더 추앙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여막 주변은 매우 적적하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대호 한 쌍이 나타나서 여막 가까이 접근하는지라 공도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시묘 중에 달아날 수 없어 두 호랑이의 접근에 개의하지 않고 예기를 읽고 있었다. 두 호랑이는 여막 앞에 쪼그리고 앉아 좀체로 적의를 나타내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렇게 다녀간 호랑이가 다음부터는 여막 앞에서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두 호랑이는 근처 인가의 가축을 해하는 일이 없었으며 먼 곳에서 산 짐승이나 사냥하며 생활하였다. 마치 여막에서 기르는 가축과 같았다.

유언겸이 조석으로 곡을 드릴 때는 호랑이도 같이 엎드려 조아리는 시늉을 하였다. 한때 도적이 여막에 들어 곡식을 약탈하려 하니 양호가 내달아 포효하니 도둑이 기겁을 하여 도망쳐 버렸으며 또한 전염병을 앓는 중이 여막 가까이 오니 양호가 쫓아버려 유언겸을 전염병으로부터 보호해 주었다.

이때 마을에도 전염병이 창궐하여 모두 제사를 폐하게 되었다. 옛날에는 전염병이 돌 때 음식내를 내면 역귀(疫鬼)를 불러들인다 하여 제사 음식을 차리지 않았으며 자연 제사도 폐하였다. 원래 효성이 지극하고 순종하는 마음이 돈독한 유공은 달포 후에 돌아오는 기고를 못 지내게 될까 적이 근심하였다. 그런데 호랑이들은 즉시 마을로 내려가 동네를 포효하며 돌아다녔다.

동네 사람들이 혼비백산할 노릇이지만 이미 여막 호랑이의 소문을 들어 아는지라 무슨 조짐인 줄 알고 가만히 있었다. 그 후 이상하게도 이 마을에는 앓아 누운 이들이 모두 일어나고 새 환자가 발생하지 않아 언겸이 다음 달에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이런 기적같은 사실을 확인한 고을 원님은 감사에게 보고하고 감사는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34년(1540) 2월조에 보면

「충청도 관찰사 허자(許磁)에게 서장을 내리노라. 효는 백가지 행동의 근원인데 언겸의 성효가 하늘을 감동시켜서 동물까지 감동하였도다. 또한 복상 제절의 의례대로 행했으니 탁이한 효행은 아름답다 아니할 수 없다. 마땅히 포상을 내리고 적당한 집품을 제수 하겠노라. 정문을 세우고 향에서 의복 일습과 쌀 닷섬을 사급하여 얄팍한 풍속을 격려하노라.」하는 답변이 내렸다. (중종,34년 2월(1540)조)

『甲子朔下 忠淸道 觀察使 許磁 書狀曰 孝是百行之源 彦謙 誠孝格天感物如比反行 進復之喪 孝行卓異 至爲可嘉 所當 褒賞 除授當職 旌門復戶 鄕表과一襲 米五石 各別賜給 以勳薄俗』

유언겸은 성효로 용담현감(龍潭縣監)으로 발탁되었다.

공은 가난을 몸소 겪었으며 직접 가색에 어려움을 겪은 후라 백성의 애휼에 크게 힘써 선정의 소문이 자자하였다. 청백한 성품의 공은 추호도 미물을 범하는 일이 없어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는 고을 수령으로 성공하자 인제 현감(隣提縣監) 산계(晨鷄) 현감을 거쳐 형조 정안의 내직으로 들어왔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당시 효도의 표본을 언겸으로 삼아 효로 천거되는 사람이 있으면 항상 언겸이 표준이 되었다. 그만큼 당시 언겸의 효행은 조정 상하를 감동케 한 모양이다.

형조 정랑으로 들어올 때에도 왕의 특지로 기용된 것이다. 효행을 가상히 여긴 임금은 유언겸을 특채하여 수령으로 삼은 것이다. 이 특채가 이례적인 것으로 일약 6품관으로 임명하는 사례는 그리 흔하지 않다. 대개 팔구품의 초사를 거쳐 6품 수령으로 임명하는 것이 관례이다. 그러나 연줄 닿은 현관 하나 없는 처지에 수령 감사의 장계로 사실을 조사해 보고 감탄하여 파격적인 등용을 한 것이다.

그리고 수령으로 크게 선정을 베풀자 소송 죄인을 관장하는 형조 정랑으로 발탁하게 되었다. 그는 목민관으로서는 크게 성공하였으나 율관(法官)으로서는 자질이 맞지 않았던 모양으로 정랑 유언겸이 형조 정랑의 재목이 아니라는 조정의 의논이 잦았다. 이때 임금은 「언겸은 효자요, 청백한 사람이다.」라고 말을 막았다.

그러나 조정의 의논이 자주 일어나서 임금도 어쩌지 못하고 다시 문화현령(文化縣令)의 외직으로 내보냈다. 언겸은 원래 법률은 생소한 일이라 율령을 알지 못하여 서리가 전결하는 결과를 빚고 있다고 조정 공론이 분분하였다고 한다. 이 사실은 공을 위하여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만약 형조가 아닌 다른 부서에 배치되었더라면 크게 성취하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유언겸은 문화현령으로서도 크게 성공하여 자애로운 목민관으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언겸은 문화현령으로 재직 중 졸지에 서거하고 말았다. 그는 4군을 역수하였으나 쓸만한 가재 도구 하나 남긴 것이 없었다.
다만 그의 아들 유경인(兪敬仁)이 효성으로 천문(天聞)에 이르러 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비첩 칠비(七非)도 천한 신분에 지조로 종신하여 포상을 받았다.

공의 부음을 명종 임금에게 전하니 임금이 「언겸은 진실로 효자인데 죽었구나」하며 처참한 기색을 띄었다 한다. 이것으로 언겸의 효성이 임금을 얼마나 깊게 감동시켰나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의 서거 시 연령은 왕조실록의 기록대로 계산하면 58세가 되는데 영성 군지 등에는 63세에 서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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