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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집
글쓴이: 코스모스
등록일: 2012.04.03 조회: 1093

엄마집

 


엄마집에 다녀가는길은 마냥 정답기만 하다.
어린시절 고향마을 사람들은 모두 사투리를 썼다.
<<어디감둥>>
<<옥씨 뜯으러>> (옥수수)
고향 사람들은 어머니를 누구나 엄마라고 불렀지 어머니라고 부르는 사람 한사람도 없었다.
<<엄마 오늘저녁엔 뭘해먹소>>
<<...>>
중국의 60년대는 먹을걱정만 가득찼을때였다. 옥씨죽을 연며칠씩 먹고나면 그것처럼 먹기싫은 음식이 없었다.그래서인지 난 지금도 옥수수죽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학교 교장이였던 아버지가 노임을 받아서 시골에서는 그래도 월급쟁이 가족이였지만 엄마의 부지런함이 없었더라면 우리 여섯식구가 어떻게 살았을가?
야무진 손재간으로 엄마는 우리모두의 옷을 당신절로 지어입혔고 노래 잘하고 춤잘추는 인기있는 여자였다.마당에 한가득 채소를 심어놓고 여름내내 뜯어먹어도 잘만 열리던 가지,고추,오이였다.
그러셨던 엄마가 지금은 혼자 계신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지도 인젠 20년 세월이 다가온다. 병환에 계셨던 아버지가 연길병원에 입원했을때는 한창 5월이였다. 넓은 텃밭에 채소들을 하나도 심지 못하고 그대로만 있었다. 말그대로 싱싱함이 하나도 없는 그런 모습이였던 터밭이 지금도 눈에 아려온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
우린 하늘이 무너지는줄로 알았다.
엄마는 무너지는 하늘을 받치고 마당의 터밭에 채소들을 심어서 이고 지고다니면서 팔았다. 버려지는 이쁜 포장끈들을 주어서 광주리도 이쁘게 만들어서 함께 팔면서. 그런 엄마의 손끝은 50대 여자의 손이 아니였다.가을에 영채를 심어서 10월이면 백여근씩 지고 다니며 가만가만 열차원들의 눈길을 피해가며 차비돈도 아까워 쓰지 않고 가까이 있는 도시란 도시는 모조리 훑으면서 다니셨던 엄마였다.그렇게 엄마는 동생들을 대학도 졸업시키고 장가도 시집도 보내셨다.
오늘도 엄마집 터밭에는 먹음직한 보라색 가지들이 나를 기다려주는가 하면 노오란 오이꽃도 빙긋이 웃어주고 있었다. 키넘는 옥수수도 어느새 개초리가 나와서 흐느적거리고 있었으며 주먹만한 감자도 손끝에 매달려 나와서 마음이 즐거워졌다. 받침대의 줄을 타고 올라가는 당콩에는 엄마의 마음인양 빨간꽃이 피여 눈이 부신다.
옛날 엄마는 마당의 채소를 자식들의 공부를 위한 정성으로 가꾸었다면 오늘은 자식인 내가 뜯으러 가는멋에 키우시는것같다. 내가 먼저 뜯어간후에야 동네 사람들께 나누어도 주시는 엄마 . 그래서 나는 여름에 겨울보다 더 자주 엄마집에 가는지도 모르지만.
엄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롱조롱 달린 고추도 뜯는데 엄만 또 부탁이다.
<<선호애빈 장에다 찐 고추랑 가지랑 좋아하니 저녁에는 싱싱한것 쪄주어라>>
엄마집이 포근한멋은 엄마의 딸을 아껴주는 마음도 있어서이겠지만 언제나 가정을 아끼면서 살아라는 엄마의 부탁이 내 생에서의 가로등이 되여주는것이 아닐가 싶다.
마음이 번거로우면 엄마집에 가서 채소밭의 채소들과 대화를 나누고 나면 기분이 바뀌여지는것도 생각하면 별로 이상할것 없다.
엄마집.
엄마집 호박꽃에 꿀벌 하나가 날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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